헬페미니스트 선언 Quotes

Rate this book
Clear rating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by 윤김지영
2 ratings, 5.00 average rating, 0 reviews
헬페미니스트 선언 Quotes Showing 1-3 of 3
“여성을 욕망하는 방식 역시 여성혐오를 구성하는 주요 축입니다. 대다수 남성은 자신이 얼마나 여성을 욕망하는가를 과시함으로써 자신 안의 여성혐오를 부정할 수 있다고 오인하지만 이는 순전한 착각입니다. 그들은 단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대하며 남성에 의해 언제든 탈취 또는 정복당할 수 있는 삽입 대상이자 구멍으로 욕망할 따름입니다. 때문에 지나치게 능력이 있거나 적극적인 여성, 심지어 자신보다 키가 크거나 똑똑해 보이는 여성에게 불안감을 느낍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강해야 하며 약자인 여성을 보호, 통솔, 통제,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과 태도는 신체를 운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컨대 이성애자 남녀 커플이 걸을 때 키 차이와 무관하게 상대의 어때에 손을 올리는 쪽은 남성입니다. 이는 위계적 젠더 의식이 애티튜드 전반에 녹아있음을 보여줍니다.”
윤김지영,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폭로는 두려움 없이 말하기, “진실의 용기”라 할 수 있습니다. 폭로는 푸코가 재발굴한 파르헤지아 개념과 연동됩니다. 파르헤지아란 두려움없이 말하기로서 진리를 향한 고된 여정이자 진리에의 “끝없는 노동”이며 자신의 삶을 건 모험적 발화로서 자신은 물론 세계에 파장을 던져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직시하는 용기이자 끊임없이 “자기와 자기 자신간의 진리놀이”를 철저히 감행하는 일입니다. 이때 자기 자신이란 고정된 동일자로서의 실체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의 진리놀이’라는 실험의 팽팽한 긴장을 견뎌내려면 끊임없는 자기 변형과 변이라는 생성의 장에 내던져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앎과 말하기의 생산은 고질적 습관의 변경, 편견의 패기, 태도의 전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변신의 에너지가 부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말하기란 동어반복에 불과하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간증하는 행위일 따름입니다.
자기 자신, 즉 말해져야 할 자기 자신이란 유폐적이지 않고 세계와 타자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진리놀이’는 스스로에 대한 변이의 궤적이자 자신과 세계에 대한 조형력 형태를 구상하고 조각하는 실험행위입니다. 헬페미니스트의 폭로가 두려움 없이 말하기 양식인 이유는 우선 자아 담론이 아닌 자기의 변신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헬페미니스트는 폭로를 통해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자아를 건져 올려 세계로 내던지는 실험을 감행합니다. 여기서 자아와 자기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자아’는 영어로 에고이고, 불어로는 무아에 해당합니다. 자아는 일치가 전제된 고정적 실체로서의 단위를 뜻하며 고백 서사로 이어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고백은 합일을 지향하는 순응적 자아의 서사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고백 서사에서 진정성을 지닌 자아 담론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순응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고정불변인 진리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통합 서사로서의 자아 담론은 세계와 자기 자신 중 어느 것도 흔들지 않고, 미리 설정된 하나의 안전한 자아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보수적 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자기’는 영어의 셀프이자 불어의 스와에 해당합니다. ‘자기’는 변신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과정 속에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헬페미니스트는 유폐적 자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은 물론 세계를 들썩여 균열을 일으키는 변이체입니다. 그들은 폭로라는 두려움 없이 말하기를 통해 더 이상 고백 서사 안에 머무는 ‘진정성 없는 피해자’로 남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순수한 피해자’, ‘불쌍한 피해자’, ‘약한 피해자’만 가시화될 수 있는 기존의 남성 중심 사회의 발화 구조를 허무는 일입니다. 듣는 자의 가청 범위에 부합하는 언어를 구사했을 때만 주어지는 말의 자리라면, 그런 자리는 필요 없다는 선언입니다. 헬페미니스트는 자기 자신은 물론 세계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전진하는 존재입니다.
폭로가 두려움 없이 말하기인 또 다른 이유는 폭로가 고백과 같이 안전한 보루를 남겨둔 말의 교환행위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고백은 고백의 값을 챙겨가기 위해 억제와 정제의 문법을 따르는, 속죄와 사죄, 구원을 담보로 한 계산된 말하기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고백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을 드러냄과 동시에 감추는 말하기 방식입니다. 그러나 폭로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비밀을 외침으로써 자신의 안전한 보루마저 없애버립니다. 위험한 말하기로서 폭로는 자신을 ‘전부 아니면 무’를 향해 내던지는 행위이기에 ‘진리의 용기’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폭로는 죄책감에 갇힌 발화 양식이 아닙니다. 고백은 ‘내 탓이오’를 외치는 자책을 통해 자기혐오와 순응화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폭로는 자기검열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길어내는 작업입니다. 정작 강간을 자행한 가해자는 소환되지 않고 피해자에게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요구하는 강간문화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잔혹한 폭력임을 고발하는 실천입니다. 폭로는 청자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폭로는 오롯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 배려의 기술로 나아갑니다.
들을 만하게 걸러진 이야기가 아닌, 날 것으로서의 생생한 말하기 방식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통각을 최대화합니다. 지금까지는 말하는 자의 언어구사력이나 어조, 진정성 등이 문제시됐다면, 이제부터 듣는 자의 가청 능력 자체가 문제시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들을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게으른 청자가 누려온 특권은 박탈되어야 합니다. 파르헤지아로서의 폭로는 자기 배려에 집중함으로써 타자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성 중심적 사회 내 강자에 대한 두려움과 굴종을 멈추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두려움 없이 말하기는 권력의 지배기술에 포섭당하지 않는 저항의 기술이기도 한 것입니다. 폭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임과 동시에 권력의 두 가지 지배 기술 - 규율이라는 미시적 권력기제와 생명정치라는 거시적 권력기제 - 을 분쇄하는 저항의 정치입니다. 자신을 단련, 배양, 성장, 변형하는 자기 통치술로 기존의 통치술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지요.”
윤김지영,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한국사회의 특징은 혐오의 대상이 여성에게 집중되고 특화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식민지 남성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남성에 의해서 자신의 권위와 주권을 모두 빼앗겼던 한국 남성은 전형적인 강자로서의 남성성이 박탈당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남성성을 복원하는 길은 내국인 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이라는 경로를 따랐지요. 해방 이후, 독재정권, 군사정권을 통해 비대해진 남근성을 가진 ‘아버지의 이름’이 사회 곳곳에 설치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의 효율성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입증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어떤가요? 청년세대는 공적인 공간에서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되며, 사적인 공간에서도 경제부양자로서의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경제 부양자로서의 특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부모의 자산에 빌붙지 않고서는 독립도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이들은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 축소된 남성성을 복원하기 위해 소수자인 여성을 짓밟고 혐오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남성에게 여성은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지요. 여성의 몸을 통해서만 부계혈통을 계승할 수 있으며, 여성 노동의 집약적 착취를 통해서만 제사라는 가부장적 의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주류적 남성성, 승자와 강자로서의 남성이 된다는 것은 여성이라는 최종적 식민지의 착취를 통해서만 유지 가능한 셈입니다. 때문에 남성은 여성을 혐오하고 사회적, 경제적 중심에서 제외하지만, 여성을 완전히 배제한 공동체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 여성들은 여성들만의 독립된 공동체를 꿈꿀 수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번식 탈락과 여성의 비혼 선언, 출산 파업, 연애 거부의 길항 구조를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여성에게 있어 남성과의 성적 계약 (결혼)은 한 남성을 소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성은 결혼제도를 통해 남성을 사유화할 수 있는 특권적 입장에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청년 담론의 절망 버전인 헬조선의 지형도에서 여성의 지옥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헬조선의 지형도에서 여성은 ‘보픈카’, ‘보슬아치’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육체 자본을 통해 쉽게 살아가는 무임 승차자로 규정됩니다. 여기서 보픈카는 언제든 신체 자본을 교환대상으로 활용하고자 자신의 성적 접근성을 쉽게 용인한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보슬아치는 여성의 성기가 벼슬아치와 같은 가치로 지나치게 상향 평가되어 여성에 의한 남성 착취가 연애나 결혼 시장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그밖에도 ‘김치녀’와 ‘된장녀’의 경우처럼, 여성은 남성의 권리를 박탈해가는 이기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윤김지영,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