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시인이 다섯번째 시집『은는이가』. 총 4부로 구성을 한 이번 시집은 생과 사의 소란스러우면서도 쓸쓸한 낯빛을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통통 튀는 언어 감각으로 자칫 비루할 수 있는 삶에 반짝, 거울에 비친 볕의 쨍함을 희망으로 비추는 시인 특유의 재주가 탁월하게 발휘된 시편들로 가득하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사랑의 병법」)를 순식간에 알아채는 육식의 눈이 있는가 하면, 기다리고 기다렸다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꽃들의 만(灣)」)을 꽃이라 정의하고 기다리는 초식의 엉덩이도 있다.
- [불선여정(不宣餘情)] p13. 쓸 말은 많으니 다 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다 오르지 못한 계단이라 하였습니다
- [꽃들의 만(灣)] p14. 첫 꽃은 첫 꽃의 의지대로 / 끝 꽃은 끝 꽃의 의무대로 / 꽃이란 미래의 기억이라서 / 지나가는 소음이라서
- [그냥 그런 사람] p20. 첫눈이어도 금세 사라질 눈인 듯 / 첫 숨이 아니어도 쉼 없는 숨인 듯 / 괄호에 묶어둘 누군가가 있다는 건 든든한 일입니다
- [저글링 하는 사람] p23. 해를 던져올려 달을 내려받는 아침저녁이 기우뚱 너를 놓치고 리듬을 놓칠 때, 울면 웃음거리? / 새벽이 되어도 포물선 한끝이 돌아오지 않았다
- [은는이가] p24.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 [시] p31. 바람의 앞니가 웅덩이 물낯에 잇자국을 만들고 갑니다
- [한 걸음 더] p35.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 알았다 해도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일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 모르니까 한 걸음 더
- [끝없는 이야기] p48~49. 네 졸업사진 배경에 찍힌 빨간 뺨의 아이가 나였다든가 내 어깨에 떨어진 송충이를 털어주고 갔던 남학생이 너였다든가 혼자 봤던 간디 영화를 나란히 앉아 봤다든가 한날한시 같은 별을 바라보았다든가 네가 쓴 문장을 내가 다시 썼다든가 어느 밤 문득 같은 꿈을 꾸다 깼다든가
- [비어 있는 손] p61. 어떤 이는 태평양을 기억 없는 눈물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이 세상을 기약 없는 계절이라 했다 / 빈 손바닥에 파인 길을 누군가 건너고 있다 / 기억의 기약 없이 노래하고 있다
- [놓아라! 지구] p80. 그런 아침을 여는 천장은 젠장이고 / 그런 천장을 바라보는 눈길은 제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