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강렬한 주술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생의 원초적 비애와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을 통찰해온 김승희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이다. 6년 만에 출간되는 이번 시집은 표제작 「냄비는 둥둥」을 비롯하여 70여편의 시를 수록했다. ‘냄비는 둥둥’이라는 제목은 장마때의 물난리에 가난한 사람들이 냄비를 두드려대는 아르헨티나의 소요 장면이 겹쳐지며 만들어진 시어로, 시집 전편에 걸쳐 흐르는 생의 율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냄비는 둥둥」「나는 그렇게 들었다」 「새벽밥」 등의 시편에서 시인은 밥을 지어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아들의 운동화를 빠는 등 일상적인 삶의 행위를 시적 사유에 녹여낸다. 그렇게 발화된 시어들은 고통을 견디고 곧 음악과 웃음이 되어 흘러나와 마침내 삶의 바퀴로써 세상을 굴려나간다. “사자의 검 같은 이빨들이 오드득 오득/머리뼈 씹는 소리 들려오는데”(「푸른색 5」) “뼈를 깎는 그 고통이 지나야만/ 웃는 웃음 ㅇ이 바퀴를 굴려 나가리니”(「사랑은 ㅇ을 타고」)에서 보듯 시인은 자신과 주변의 고통을 구체적인 것으로 느끼고 고스란히 아파하되 굴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느긋한 기다림의 자세를 취한다. “사자 아가리 속에서 머리뼈 하나 부서지지 않고/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내가 살아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는 날도 온다”(「푸른색 5」)고 나직이 말하는 것이다. “레몬즙을 쥐어짜는 시간엔/말이 없다, 레몬-타임/두 손에 힘을 더하고 더하며/눈을 감고 조용히 기다려라, 레몬-타임”(「레몬즙을 쥐어짜는 시간」).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시인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몇개의 벼락같은 환상”(「빨강색」)은, 「혈연들」「유령 배역」「쌩 레미 요양원」 등의 시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프리다 칼로, 실비아 플라스, 나혜석 등 여성들과의 연대이다. “뉴멕시코에서 혼자 살다/꽃과 죽은 소의 하얀 머리뼈, 분홍 사막 언덕을 많이 그렸던/그 여자, 누구지?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그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이런 종류의 인류가 나의 친구다”(「쌩 레미 요양원」) “나는 프리다 칼로다-/척추에 버스 철골을 끼고/전신마비 침대를 타고 나는 이 거리를 달린다,”(「탱고-프리다 칼로」)라고 시인이 고백할 때, 이는 관념적 페미니즘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함께 사는 동료로서 여성예술가들을 대하는 것으로 읽힌다.
고독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또하나의 축은 종교적 상상력이다. 「미제레레」 「스티그마타」 「향연, 잔치국수」 등의 시편에서는 성서의 언어가 시인의 삶에 충실하게 녹아 있어 시인의 따스하고 새로운, 느긋한 삶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한사발의 잔치국수를 앞에 놓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담담히 떠올리거나(「향연, 잔치국수」) 예수의 다섯 상처의 고통으로부터 우주적 사랑을 발견한다(「스티그마타」).
평론가 유성호는 시집 안에서 파동치듯 흐르고 있는 음악의 율동적 감각에 주목하며 궁극적으로 그 율동이 가져다주는 야성을 꿰뚫어본다. “그의 시편들은, ‘광기’나 ‘초월’까지 넘나드는 경쾌함을 견지하면서 우리 육체가 기억하는 생의 율동을 활력있게 들려준다. (…) 김승희 시학은 우주적 ‘율동’을 통해 생명의 순간과 언어들을 채집하면서, 잃어버린 야성을 탈환하고 복원한다.”(「다성악으로 울리는 야성의 상상력」)
「별」 「저 산을 옮겨야겠다」 등에서 보이듯 재치있는 시어 운용, 놀랄 만한 시적 직관과 상상력을 보여주는 김승희의 이번 시집은 ‘둥둥’ 경쾌한 울림과 함께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다.